우상으로  가득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미지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은 ,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름(calling)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토론이나 논쟁이 아닌, 장엄한 선포이며,
그 안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과 사랑과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단 한 줄의 설명도 없이 아브람을 불러 아브라함으로 변화시킨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그 이름에서 말해 주듯, 평범한 한 사람,  ‘큰아버지’같은 삶에서  이스라엘의 조상 , 그것도 언약을 계승해 나아갈 ‘열국의 아비’라는 어마어마한 축복의 삶으로, 그 인생의 스토리를 완벽하게 전환 시키는  주님의 원대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같은 시대, 동방의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났던  욥을 제쳐두고, 오히려 이방신이 우글거리는 음침한 우상의 땅에서,  그것도 우상을 만들어 파는 데라의 아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의  지혜와 절대주권에 대한 확신으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지금 현재, 의인 ‘욥’으로 살아가고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계획 없이는, 그저 한 사람의 ‘아브람’으로 살다가  안개처럼  이 땅에서 덧없이 스러져 갈수 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길 만큼 절대적 순종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때로 문제 앞에서 넘어지고 , 유익 앞에서 이기적으로 돌변하여 좌충우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복의 근원으로서 개인은 물론, 가문과 민족과 세계를 구원하는 축복을 누립니다.  그런 그의 인생 스토리 속에서, 사건은 달라도  내용이 너무나 닮아 있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능히 발견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편으로,  우리를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우리의 실패나 실수에 상관없이  절대로 변경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힘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완전한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장 1~ 3 표준 새 번역)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 곧  우리의 옛 배경을 완전히 벗어버림으로써 옛 생각과 체질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태어날 때부터 창세기 3장의 원죄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진노의 자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적 모습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창세기 1장의 원래 모습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자라나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은 구원의 빛이 되어 온 가정과 가문은  물론 민족과 세계를 향해 능히 밝힐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다짐을 하십니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창 12:7)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 가나안은 장차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장차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가 이 땅에 오게 될 최고의 축복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 졌을 때, 그는  환경 속에서 넘어지고 인간관계 속에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던 그의 인생 여정 속에 뜻하지 않은 두 가지 문제가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는,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 사래 때문에 어쩌면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듭거듭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벗어난 것은 결국 육신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문제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공격하는 최고의 악랄한 복병입니다.
심지어 공생애를 앞두고 주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와 유혹하는 사단의 목소리는 돌덩어리로 떡을 만들어 배고픈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속삭임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그럴듯한 육신적 작은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면 그와 동시에 , 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던 뼈아픈 고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애굽 왕의 침실에 보내야 하는 그의 고뇌가 , 상상해 보건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그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궁전에 재앙을 내려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우리의 육신적 생각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라의 몸을 통해 이어질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나실 이 언약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던 아브라함은 이 일로 인해 애굽 왕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재물을 확보하게 됩니다.
양과 소, 암수 당나귀, 남여 종, 낙타들...,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 자신이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를 문제 앞에서 한 없이 비겁해졌던 그의 연약함에 상관없이, 먹고 사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 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관용을 실감합니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로마서 8장 8~9)
그러나 한 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로마서 8장 28) 하나님의 법칙이 있기에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상관없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 온 세상 끝 까지 언약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함께 했기에, 아브라함이 걸었던 미지의 땅은 두려움이 아니라 안식이었고,  고난이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수필가, 예수사랑교회 사모 김 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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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생각하면 꼭 함께 떠오르는 그 이름 - 아벨은 인류에게 최초로 시작된 살인 사건의 희생양으로서, 너무나 어이없이 허무하게 죽은 착한 사람으로 기억 됩니다.
아벨의 히브리어 이름인 ‘하벨’이 허무라는 뜻이라고 하니 더욱 그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내용이야 어찌 됐던 그나마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린 가인의 타락과 실패도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지만, 하나님이 사랑했던 아벨의 죽음은 때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사건 중 하나입니다.
하긴,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차별 대우 하셨다는 대목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만 열납하셨으며, 아벨 또한 허무하게 죽어가야 만 했을까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해 주었듯이(디모데후서 3장 16절)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기준과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혹자는 가인이 정성이 부족했다고 말하거나 곡식을 드릴 때에 하나님의 것을 조금 훔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율법적 설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합니다.
얼마나 정성스러워야 하나..., 사실 정성으로 말하자면, 절에 다니는 불자나, 무당들의 정성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한 겨울에도 목욕재계하고 산에 오르는 정성, 공들여 천 번 씩 절하는 수고로움, 머리 깎고 속세를 벗어나 인생 전체를 바치는 희생..., 얼마나 정성스러워야 하는가에 기준을 둔 다면 우리는 늘 우리의 한계와 부족함 속에서 죄의식을 가져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예배를 받으실 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가인은 농부였으므로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을 잡아 피를 흘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함으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찾아온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입었던 아담과 하와의 안타까움을,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해결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21절)
이 가죽옷의 의미는 누군가의 희생, 즉 이 땅에 우리의 구원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And in process of time it came to pass) 언약이 희미해진 가인은 자신의 기준과 편리대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자유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가능하였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 속에서 모세는 희생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겠다고 결단한 순간, 그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민족의 지도자가 됩니다. (출애굽기 3장 18절)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그 예배는 정성의 유무가 아닌 언약의 유무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예배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 전서 2장 1~2절)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의 도를 잃어버린 오늘 날의 예배, 사람들의 상식적 기준과 변질된 신학적 해석으로 드려지는 예배들 - 그리스도의 권세를 약화시키는 인본주의적 예배, 각종 화려한 프로그램과 현란한 분위기로 사람들의 여론과 분위기만을 조장하는 예배는 바로 가인의 예배입니다.
감정과 감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려는 신비주의,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동기에 따라 오직 눈에 보이는 축복만을 간구하는 기복주의, 유대인과 바리새인처럼 전혀 영적인 눈이 열리지 못해 메시아를 알아보기는커녕, 핍박과 정죄로 복음을 공격하는 율법주의적 예배는, 아무리 긴 옷에 비단술을 달고 성경을 줄줄이 외워도 하나님이 결코 받지 않으시는 가인의 예배입니다.

가인의 예배 실패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더불어, 동생에 대한 미움과 시기를 가져와 결국, 무서운 살인으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가인의 후예 모두가 저주 아래 놓이는 인류의 재앙을 불러옵니다.
오늘 날의 사회문제와 끊이지 않는 전쟁은 타락한 인류문화를 만들어낸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낸 유산입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한 몸이 되어 가정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라멕은 타락한 여인 아다와 씰라를 얻어 일부다처제의 효시가 되었음은 물론, 향락과 음란의 문화를 만들어내었으며 두발가인은 각종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 증오와 복수, 정복과 전쟁을 심화시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린 아벨은 왜 그 이름 그대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을까요...
아벨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책망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문득 재미있는 일화가 떠오릅니다.

역사상 3명의 악처가 있다고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성경에 나오는 욥의 아내, 그리고 요한 웨슬레의 아내 몰리라고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했던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며 하나님을 잘 섬겨 일곱 아들의 숫자대로 예배 드렸던 욥은 영적인 눈이 열리지 못해 사단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구속자로 오실 메시아 신앙이 없었던 인생 가운데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다.
온 세계를 자신의 교구삼아 수십만 마일을 전도 여행한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가 성질 사나운 아내에게 머리카락을 잡힌 채 호텔 방바닥에서 끌려 다녔다는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서도 과연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이미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장 28절)
이 땅에서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는 길은, 성령의 충만한 힘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를 사용하여, 가인으로 하여금 미움과 시기와 불평을 갖게 했던 그 어둠의 영, 창세기 3장에 출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함으로 에덴의 축복을 빼앗아간 그 사단과 싸우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어, 그 언약 안에서 예배드리는 성도의 삶은 아벨의 삶처럼 무기력과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김유순ㆍ수필가ㆍ예수사랑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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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의 시작은  ‘하나님같이’ 높아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견고한 도시를
형성하여 ‘흩어짐을 면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을 쌓음으로,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잘 살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인간 본위의 야망과 욕심의 결과는 결국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뎅그러니 터 만 남은 바벨탑의 자취와 같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욕심  뒤에는 공허만이 영혼 가득 내려 앉아 ,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 파괴시키는 재앙을 불러 옵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류타락이 바벨탑의 몰락에  종종 비유되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여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이기적이고 교만하여  이웃을 무시하고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인본주의의 산물로, 각종 타락과 퇴폐와 살인 문화를 만들어 냈던  그- 가인의  후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바벨탑의 저주에 대한 사회적 근거도 있습니다.
경제전문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블룸버그 통신 칼럼에서 인류의 초고층 빌딩에 대한 열망이 경제위기의 전조가 되어 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예로 든 빌딩들은 이렇습니다.
고대 바벨탑을 이어 199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타워,1974년 미국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1930년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최근에 지어진 대만의 타이페이 파이넨셜 센터도 ‘초고층 빌딩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하고  천수이벤 총통의 암살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면서 두바이를 비롯한 중국에서의 높은 빌딩 짓기 시합은 내년에 있을 경제위기와 지정학적 위험 등을 피해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매경, 06, 12,12)
그러고 보니 미국의 쌍둥이 무역 센터는 수 없는 인명을 앗아갔고 그 재앙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희대의 복수극을 낳아, 오직 자국의 이익과 욕심에 따라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는 대 재앙을 불러 왔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서울과 지방에 초고층 빌딩을 지을 계획이라는데, 그 많은 사무실을 다 채워 입주할 업체가 있을 지,  그로인해 경제적 손실과 파산을 가져올지 몰라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아랍의 속담대로라면, 무리와 권력과 교만은 가장 치명적인 배합입니다.

교만이라 함은  히브리어로는 ‘알라로네이아’ 혹은 ‘알라론’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물을 의뢰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거부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무리를 만들어,  절대 흩어지지 말고 똘똘 뭉쳐 힘을 발휘하자고 공모하는 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바벨탑의 저주이며 그 결과는 파괴입니다.

바벨탑의 시작이 ‘하나님같이’  높아보려는 데 있었다고 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발상은 곧, 창세기 3장에 출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고,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파괴시켰으며, 형이 동생을 무참하게 죽이는,  인류 최초의 비극을 충동질 했던 -사단- 간교한 들짐승인  뱀 속에 들어가 에덴의 축복을 빼앗아 가버린 그 마귀의 속삭임이라는데 영적인 촉각을 세워야 합니다.
그로부터 땅은 저주를 받아 독을 뿜어내고 인류는 해산하는 고통과 노동의 수고로 땀을 흘리지만 결국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이던 마귀의 속삭임은 거짓말임이 확실한데도, 인간은 아직도 착각에 빠져 죽지 않을 것처럼 악을 쓰며 집착합니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려는 끝없는 야망도 결국 한 줌 먼지로 돌아가련만 , 앞 다투는 경쟁 속에서,  네가 더 높으냐 내가 더 높으냐, 비교하며 경쟁하며 서로를 짓밟습니다.

이것은 단지 건물 높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심령 속에 자리 잡은 이기심과 명예욕의 문제, 나아가서는 영적인 문제까지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눈여겨봐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처럼’ 되어보려는 각종 종교들, 뉴 에이지 사상과 철학들, 불건전한 신비주의,  미신과 역술, 헛된 철학들은 무너져 내릴 바벨탑의 벽돌과 같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헛된  것일 뿐 아니라, 사단의 궤계에 매여 재앙과 타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바벨탑이 시작된 또 하나의 발상은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이래로,  인류를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라고 부탁하십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지상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18-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마가복음 16: 15-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그런데,  마가다락방에서 체험한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 내면에 흐르는 민족적 이기주의인 선민사상의 틀을 뛰어 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그 때, 똘똘 뭉쳐있던 초대교회를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단이 충만하여 사도들을 속임으로 죽음을 면치 못하고, 히브리파 과부와 헬라파 과부들은 밥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신실한 집사 스테판이 유대인의 손에 순교함으로써 큰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핍박을 피하여 빌립은 이방인의 땅으로 도망치지만 그 결과 , 사마리아와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심 장소인 다메섹에서는 살기등등한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되어  세계선교의 장을 펼쳤습니다.
흩어지지 않았던 초대교회에 위기가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원대한 물밑 계획은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같이 되어,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바로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그 속삭임은 바벨탑의 재앙을 낳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들마저도, 흩어짐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계획을 모르면 -다시 말해 전도와 선교를 깨닫지 못하고 세계복음화에 대한 민감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있는 자리에서 제각기 높이 자랑하지 말고 어서 흩어지라고 촉구하십니다.


수필가,  예수사랑교회 사모 김 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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